62달러로 시작한 아메리칸 드림

한아름 마트 맞은편에 위치한 가동 빌딩의 건물주 김동식(53)씨. 김동식씨는 한인 사무실이 많이 입주해 있는 가동빌딩의 주인으로보다는 플리 마켓(Flea Market)업계의 마이더스로 더 유명한 인물이다. 플리 마켓 장사를 통해 현재 페데럴에 있는 인도어 플리 마켓(Indoor Flea Market) 건물 3동과 가동 빌딩 등 총 4개의 건물을 소유할 정도로 성공을 했기 때문이다. 김 사장 스스로도 장사에 관한 한 “천운을 타고 났다”라고 말할 만큼 사업에 운이 많이 따랐다. 그러나 운도 운이지만 김 사장의 낙천적이고 부지런한 성격, 20년 동안 장사꾼의 외길 인생을 걸어온 뚝심도 김 사장의 성공에 한 몫을 단단히 한 것이다.   

김 사장은 1987년 9월27일, 주머니에 단돈 62달러를 들고 두 동생을 데리고 덴버 공항에 도착했다. 오자마자 생계를 위해 바로 건물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하루에 4시간씩 자면서 밤에는 건물 3개를 청소하고 낮에는 치과 기공을 배웠다. 한 건물당 한 달에 500~600달러 밖에 받지 못했지만 돈 모으는 재미에 즐겁게 일을 했다.

1년을 꼬박 청소해 27,000달러를 모았다. 그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치과 기공을 좀 더 배우고 싶어서 시애틀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별다른 수입이 없어 가지고 있던 돈을 거의 다 써버리고, 남은 3천 달러를 들고 다시 덴버로 돌아왔다. 덴버에 돌아 와서 열심히 배운 치과 기공을 활용하려고 노력했지만 병원측과의 언어소통의 문제로 결국 포기하고 청소를 다시 시작했다.

그 때 인도어 플리 마켓이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곳을 찾아갔다. 지인의 권유로 자본 1500달러를 가지고 200 스퀘어 피트의 실내 공간을 빌려 자동차 사운드(Auto Sound) 장사를 시작했다. 일이 되려고 했는지 그 때 멕시칸들이 덴버로 대거 이주해오면서 때가 적절히 맞아떨어졌다. 돈이 벌리기 시작하면서, 1년 뒤에 그 건물의 10년 리스를 넘겨받았다. 이후 김 씨가 스페인어 TV 채널에 광고를 내보내면서 멕시칸들이 인도어 플리 마켓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김 사장은 장사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그런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1996년 4월 15일 아침, 전기 누전으로 인해 불이 나면서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물건들도 모두 타버려 김 사장은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 살아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재건 공사로 9월에 다시 문을 열기 전까지 5개월 동안 그는 인도어 플리마켓 옆 아스팔트 위에서 노천 장사를 했다. 화재에 타고 남은 물건들도 팔고, 마일하이 플리마켓에서 채소와 과일을 떼어다가 팔기도 했다.

400달러의 자본으로 채소와 과일을 사다 팔아서 한 달에 5,000달러의 이윤을 남겼으니 본인은 운이라고 얘기하지만, 이쯤 되면 장사하는 능력을 타고 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문을 연 인도어 플리마켓은 ‘불난 집은 장사가 잘 된다’는 속설처럼 말 그대로 돈을 긁어 모을 만큼 장사가 잘 됐다. 인도어 플리마켓에 들어와 장사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1년 만에 빚 30만 달러를 다 갚고 그 옆에다 새로 건물을 지을 만큼 돈을 벌었다. 

김 사장이 처음 미국에 오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는 각종 기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직장을 구하지 못해서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국에서 직장에만 들어갔다 하면 그 회사가 부도가 났다. 한 두 번도 아니고 무려 4번이나 그랬다. 김 사장은‘장사할 팔자가 회사에 들어가 월급쟁이 노릇을 하려고 하니 기운이 맞지 않아 그렇지 않았겠느냐’며 자문했다.     

 “마일하이 플리마켓의 노천에서 하루에 25달러 자리세를 내고 좌판 두 개를 깔아놓고 쫄쫄이 바지와 티셔츠를 판 적이 있다. 한여름 100도가 넘는 날씨에, 그 뜨거운 햇빛을 받아가며 노천 장사를 했어도 즐거웠다”고 한다. ‘장사가 가장 잘 맞고 재밌다’는 김 사장은 한국 경기도 가평군 5일장의 원조 장꾼인 아버지의 ‘장사꾼’ 피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62달러로 시작된 김 사장의 아메리칸 드림은 자기 배만 불리면서 끝나지 않았다. 지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의 고등학교에 매달 장학금을 보내면서 매년 불우 가정의 청소년 10명씩을 공부 시켰고, 나환자 촌과 중국 연변에도 기부금을 보내는 등 나눔의 의미를 실천해 왔다. 또, 김 사장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매년 라스베가스 컨벤션 머천다이즈 쇼에 가서 새로운 아이템을 알아보고 상품성 있는 신상품들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아이디어를 찾는다.

늘 넉넉한 웃음에 마음씨 좋은 옆집 아저씨와 같은 김 사장. 지난 세월, 그는 낙천적인 성격 덕분에 힘든 일도 즐겁게, 무난하게 넘길 수 있었다. 시련이 있어도 장사꾼일 때가 가장 편하고 즐겁다는 김 사장은 뼛속까지 장사꾼으로 살아가는 천상 장사꾼이다.      


<이하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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