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아버지와 어머니가 덴버에 오셨다 돌아가시면서, “이번이 마지막이겠다”라고 하셨던 말이 생각난다. 그래도 한번도 더 오실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아버지의 건강상태가 부쩍 나빠지셨다. 아버지의 예견대로 이제 콜로라도에 있는 딸네 집에는 더 이상 오지 못할 성 싶다. 지난해 1월, 필자의 남편이 간이식 수술을 받았을 무렵 옆에서 챙겨주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해 여름, 팔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이 곳까지 날아오셨다. 오신 김에 콜로라도를 두루 여행했는데, 걸어 다니실 때마다 아버지의 신발이 불편해 보였다. 그래서 새 신발을 사기 위해 유명 수제구두 가게를 수소문해 찾아갔다. 구두 가게의 점원은 아버지의 발 길이와 발 볼까지 꼼꼼히 체크하면서 딱 맞는 신발을 꺼내왔다. 아버지는 너무 편하다면서 마치 어린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좋아하셨다. 그렇게 좋으면 두 켤레를 사자고 했더니, 어머니는 한 개도 오래 신으니까 한 켤레만 사도 충분하다 며 딸이 돈 쓰는 일을 한사코 마다하셨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 때 두 켤레를 사 드리지 못한 것이 자주 후회스럽다.

      필자는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아버지가 편하지 않았었다. 아버지를 ‘아빠’라고 편하게 부르게 될 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가 편하지 않은 이유는 필자에게 불만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여자가 서울로 대학을 진학한 것도 탐탁치 않으셨고, 배낭 메고 세계를 돌아다니는 딸은 더욱 그랬다. 또, 고등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사모실 때 지방 쓰는 방법을 익히지 못한 것도, 9시 넘어서 집에 귀가하는 것도 불만이셨다. 아버지에게 딸의 미래는 집 소재지 근처의 대학에 조신하게 다니다가 선생님 같은 안정된 직업을 선택해 좋은 혼처가 나면 늦지 않게 시집가는 것이었다. 필자가 중학생일 때는 아버지와 대화하기에 너무 어렸고, 고등학생 때는 입시전쟁으로 부모님과 대면할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대학을 가면서는 서울살이로 일 년에 한 달도 채 함께 있지 못했다. 고작 그 한 달도 친구들 만나서 노느라 정작 아버지 어머니와 보낸 시간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참 오랫동안 아버지와는 깊이 없는 대화만 나눈 것 같다. 그러다 결혼을 앞둔 필자에게 당신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은 적이 있다. 그 뒤 필자는 아버지의 자서전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를 향한 마음이 존경으로 바뀌었다.

      언젠가 언급한 적이 있는데, 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임시직으로 국방부 문턱을 밟았다. 그러고 몇 년 뒤 아버지는 9급 군무원이 되었고, 2급 이사관까지 가는데 38년의 세월이 걸렸다. 남들처럼 버젓한 대학이나 국방부 근무에 유리한 사관학교라도 졸업을 했었다면 승진은 훨씬 빨랐을 것이다. 한국에서 성공을 위해 꼭 필요한 학연, 지연이 없었던 아버지는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했어야 했다. 참으로 외로운 싸움이었을 것이라 감히 짐작해 본다. 아버지는 매번 승진시험이 있을 때마다 자식 4명이 복작거리는 집에서 동그란 밥상을 펼쳐놓고 밤샘 공부를 하셨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떨어지신 적도 있지만, 결국 38년이라는 세월을 국가에 바쳤고 대통령 훈장을 넘어 자랑스런 대한민국 훈장을 받고 퇴직하셨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을 새록새록 발견한다. 나는 대학 시절에 군인 자녀 기숙사에서 1년 정도 지낸 적이 있다. 아버지는 일요일 아침마다 기숙사로 전화를 걸어와 사감 장교와 얘기를 나눈 뒤, 내 방으로 교환을 요청했다.

     막상 통화가 되더라도 하는 말은 똑같았다. 늘 “밥 챙겨 먹어라” 라며 간결하면서도 딱딱한 말투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의 말투에서 정말 딸이 밥을 잘 챙겨 먹었으면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전해졌다. 지난해 아버지와 어머니가 2주 동안 필자의 집에 계실 때다. 필자는 저녁마다 반주를 즐기는 아버지 옆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당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는 “내일 출근해야 하는 애 붙잡고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고 빨리 자리를 파하려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아버지께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의 인생 무용담을 듣는 듯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필자에게 당신의 20대, 30대, 40대, 50대 시절을 줄기차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사회 생활에서 인간관계의 중요성과 그 만의 매니지먼트 노하우를 알려주셨는데,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게 주옥 같은 조언들이었다. 어머니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아버지의 치열했던 인생 이야기에 푹 빠져버렸다. 예전에는 지겹고 따분한 얘기였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이는 필자의 시각이 달라졌을 뿐, 아버지가 바뀐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 아버지가 말하는 것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또 다른 의미가 아닐까.

      그런데 이제 막 그를 이해하기 시작했건만, 함께 할 시간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보인다. 아버지의 무뚝뚝한 말투, 무표정한 얼굴 모두가 이제는 근심 어린 사랑임을 안다. 비단 필자의 아버지만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서야 불러만 봐도 가슴 찡한 단어가 어머니뿐이 아님도 알게 되었다. 이를 깨닫는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아버지는 돈 벌어오는 사람으로만 생각했었다. 무섭게 야단치면서 항상 강할 것 같았던 호랑이 아버지는 어느새 손주들의 말 한마디에 웃고 우는 사람이 되었다. 비록 나이 들어 외모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가지만, 우리들에겐 영원히 강건한 호랑이임을 다시 한번 전하고 싶다. 그리고 20대의 풋풋한 시간, 30대의 아름다운 여인의 시간, 40대의 여유로운 시간을 포기하면서 평생 자식과 남편에게 헌신한 어머니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딸들은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지. 좀더 당당하고 멋지게, 나를 위해 살아야지’라고 말이다. 하지만 어느새 필자도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여인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을 가진 이 세상의 어머니, 언제 불러도 그리운 이름이다. 이번 주에는 어버이 날이 있다. 때로는 자식은 부모를 투정의 대상으로, 때로는 무시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조건없이 끝없는 사랑을 베푸는 우리의 부모님들, 당신의 한없이 넓고 깊은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무례함을 용서하시길. 대학 입학 후 컴퓨터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딸을 위해 애지중지하던 롤렉스 시계를 팔았던 아버지인데, 그 신발 한 켤레를 마저 사드리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올해 한국을 나갈 때에는 시계는 아니더라도 신발 한 켤레는 더 사 가지고 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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