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에서 만들어진 자동차들은 6실린더 엔진이 최다 실린더였습니다.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는 8실린더 엔진의 수요가 없었기 때문에 8실린더 엔진을 개발하지도 않았고, 8실린더 엔진을 수입 장착하여 신차를 출시한다 하여도 여건상 판매 가능성이 낮았기에 외면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배기량에 비례해서 올라가는 자동차 세금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람들은 3000cc, 6실린더 엔진도 필요 이상으로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대 최고급 국산차인 현대 그랜져는 3.0리터 6실린더 사양이 있음에도 2.0리터 4실린더 엔진을 장착한 차량이 가장 많이 팔렸습니다. 그리고는 2.0리터 4실린더 그랜져를 구입하여 뒤에 붙은 2.0 엠블럼을 떼어 내고 3.0 V6 엠블럼만 사서 붙이는 일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자동차 출고장 근처의 카센타에서는 3.0 V6 엠블럼이 불티나게 팔리고 그 때문에 엠블럼 제조사가 대박 났다는 후문도 들렸으니까요. 이 해프닝은 실린더수가 많고 배기량이 크면 고급차라는 인식 때문입니다. 실제로 4실린더보다는 6실린더가, 그 보다는 8실린더 엔진이 배기량도 크고 고성능입니다. 그러나 한국인 시각에서 보면 8실린더 엔진은 불합리한 점이 많았습니다. 배기량에 따른 세금도 부담스럽고, 엔진 자체도 무겁고 부피도 컸으므로 차체도 커야 했습니다. 한국의 높은 휘발유 가격도 작은 엔진을 선호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고배기량 엔진의 차량이 도로에 나선다 해도 구불구불한 국내 도로 사정에서는 시원하게 달릴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달리 미국 대륙에서는 8실린더 엔진이 합리적입니다. 오랫동안 미국의 운전자들에게 V8엔진은 장거리 운전의 표준처럼 생각되었습니다. V8 은 V자 형태로 실린더를 배열한 8실린더 엔진을 의미합니다. 주에서 주로 이동하는 긴 시간을 피곤하지 않게 여유 있는 출력으로 달릴 수 있고, 어쩌다 나오는 수마일에 이르는 오르막길에서도 부담 없이 쾌적하게 달리는 넉넉한 엔진입니다. 뒤에 상당한 무게의 캠핑 트레일러를 붙이고 에어컨을 틀어도 충분합니다. 커다란 차체와 그에 따른 무게는 편안한 승차감으로 작용하여 오히려 장거리 운전의 피로감을 덜어주며, 널찍널찍한 주차공간이나 저렴한 휘발유 가격은 V8엔진의 육중한 차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광활한 대륙의 거미줄 같은 도로망은 V8 엔진의 질주를 위한 무대였습니다. 1960년대, 미국의 자동차 산업의 목표는 “더 크고 강하게” 였습니다. 더 길게 더 멋지게 뽑아 올린 자동차의 날개는 찬사 일색이었고 크고 멋진 차체에 맞는 8실린더 엔진은 더 높은 출력을 위한 개조를 거듭했습니다. 연료비를 고려할 이유가 없는 머슬카의 시대였으며, 미국 대륙의 특성에 맞는 V8엔진의 최고 호황기였습니다. 이 시기의 청소년들은 머슬카를 타고 자랐으며, 머슬카 아이콘에 해당하는 포드 머스탱, 셰보레 카마로, 다지 차져 등의 차들은 모두 8실린더 V8 엔진을 장착 하고 있었습니다.
 
       머슬카 뿐만 아니라 풀 사이즈 승용차도 V8 엔진을 장착하였고, 미국에서 널리 사용되는 픽업트럭들도 V8엔진을 달고 질주했습니다. 그러면 당시 미국 사람들은 8실린더 엔진보다 더 많은 실린더수의 엔진은 고려하지 않았을까요?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60년대 중반에 사건이 터졌습니다. 1966년 프랑스 르망 24 경주에서 7.0L V8 엔진을 장착한 포드 GT40가 6년 연속 우승했던 페라리를 제치고 1위, 2위, 3위를 모두 독식한 것입니다. 이 때 출전했던 페라리 330 P3는 4.0L 12실린더 엔진을 장착하였으나 완주를 못하였고, 4위부터 7위를 차지한 포르쉐 906은 2.0 플랫6 실린더 엔진이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은 총체적 부유함으로 실질 구매력을 갖춘 두터운 사용자층이 있었습니다. 이에 근거하여 탄탄한 시장 환경을 갖춘 자동차 산업의 최번영국이었지만 모터스포츠 분야나 기술력에 있어서는 유럽 국가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르망 24 경주에서의 정상 등극으로 미국인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고 V8 엔진은 자동차의 가장 이상적인 엔진 배열로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자동차 매니아들은 V8 엔진과 사랑에 빠졌으며 미국적 V8 엔진의 대중적 성공과 이 엔진을 특별하게 생각할 수 있는 근거를 위해서, 생산성과 정비성 같은 여러 기술적 장점을 주장했습니다. 사람들은 배기음에서 느끼는 진동수가 인간 심장 박동수와 공명을 한다는 둥 불규칙하고 간헐적인 실화 현상이 인간의 감성을 자극한다는 등 증명하기 어려운 주관적 요소가 담긴 다양한 주장을 펼쳤습니다만 오늘날 시각으로 설득력 있는 정답은 없습니다. 그냥 그 시기에 당시 기술력을 기반으로 가장 필요했던 엔진이었습니다. 요즘 같은 터보나 가변밸브 시스템도 없는 자연 흡기 V8엔진입니다. 제작이 쉽고, 개조가 쉽고, 수리가 쉽고, 그러면서도 출력은 높은, 미국의 자존심이었습니다.
 
       70년대 들어서 이 미국의 자존심은 유가 폭등으로 상처를 입습니다. 미국에 몰아 닥친 고유가 파장은 운전자들로 하여금 경제성을 염려하게 하였습니다. 자동차 제조사는 연비와 수명을 고려하여 차량을 설계하고 자동차는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다운사이징의 압력을 받습니다. 차체도, 엔진도 더 작게 더 가볍게 시장의 요구에 맞춰 가는 것입니다. 많은 패밀리 세단은 점차 6실린더로, 또 4실린더로 그 실린더수를 축소하게 되며, 어지간한 고급차가 아니라면 승용차에는 V8 엔진을 사용하지 않는 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한편으론 고효율에 집중한 제조사들의 연구개발 덕택에 적은 배기량으로도 승용차를 움직이기에는 충분한 출력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V8 엔진을 장착한 캐딜락과 링컨은 80년대의 고속도로를 질주했습니다. 90년대 이후 독일산과 일본산 고급차들의 공략에 많은 고객을 빼앗겼어도 여전히 미국산 V8 엔진의 자동차는 격식을 갖춘 의전용 차량으로 오늘날까지 럭셔리카의 중심을 지켜왔습니다. 특히 픽업트럭 시장에서는 유가 폭등에도 관계없이 V8 엔진이 주력이었습니다. 전세계에서 미국만큼 픽업트럭을 많이 사용하고 깊이 사랑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2018년은 연간 최다 판매 차종 1, 2, 3위가 모두 픽업트럭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단일 차종인 포드 F 시리즈에서 F150픽업의주력엔진은 이미 3.5리터 V6 Turbo 사양입니다. 2위인 셰보레 실버라도 트럭에도 앞으로 4실린더 엔진을 장착한다 하니 고출력과 감성 보다 친환경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시대에 V8 엔진은 앉을 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트럭에서도 밀려 나면 V8 엔진을 장착할 차는 별로 없습니다. 표면적으로 자연흡기 V8 엔진의 은퇴는 자동차 기술의 발달과 온실가스 규제 정책이 근본 원인이지만 저는 다양한 분야의 미니멀리즘 트렌드가 강력한 촉매라고 봅니다. 그 당당하던 미국의 V8 엔진도 다운사이징의 대세를 피해 가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80여년 동안의 전성기를 뒤로하고 무대 뒷편으로 사라지는 중입니다. 앞으로 20년은 고사하고 10년도 버티기 어렵겠습니다. 사람도 100세를 사는 세상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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