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신문 없이 훌륭한 공동체 있을 수 없다”고 믿어

    언론인 출신으로 변호사이자 정치인이었던 에드워드 레만(Edward Lehman)이 지난 10일 롱몬트의 자택에서 9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레만은 록키 마운틴 뉴스(Rocky Mountain News)와 덴버 포스트(Denver Post)의 기자로 활동했었고, 그의 부인 루스(Ruth)는 신문사업에 뛰어들기 전에는 변호사로 일했었다. 1957년에 레만과 루스는 롱몬트에 위치했던 ‘타임즈 콜(Times-Call)’ 신문사를 사들여서 54년간 소유했었다. 1980년에 레만은 타임즈 콜을 ‘레만 커뮤니케이션(Lehman Communications)’으로 확장했고, 사옥의 규모가 45,000평방 피트에 달하는 규모였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 롱몬트의 시장으로 재임했던 빌 스웬슨(Bill Swenson)은 레만이 타임즈-콜을 운영했던 방식에 대해 "그의 인생의 기념비"라고 표현하며, “그는 지역사회에서 존경을 받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레만의 언론에 대한 접근법은 요즘 세대들에게 좋은 교훈이다”라면서 “내가 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그들이 뉴스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들은 항상 공정하고 정확했다. 레만과 그의 직원들은 신문 경영을 통해 훌륭한 일을 많이 했다”라고 추억했다. 1967년에 레만은 콜로라도 언론 협회(Colorado Press Association's Outstanding Publisher)로부터 우수 출판사로 선정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러브랜드 리포터-헤럴드(Loveland Reporter-Herald)를 사들였다. 1985년에는 캐논 시티 데일리 레코드(Cañon City Daily Record)를 인수했고 1997년 6월에는 루이스빌 타임즈(Louisville Times), 라파예트 뉴스(Lafayette News), 에리 리뷰(Erie Review)를 샀다. 레만 커뮤니케이션즈의 전성기에는 롱몬트 본사에만 직원이 수백 명에 달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레만은 콜로라도 언론 협회(Colorado Press Association)의 회장과 덴버 대학의 이사를 역임했다. 또한 보이쳐 재단(Boettcher Foundation)의 이사회에서 15년 동안 일했다. 2002년에 에드&루스 레만 패밀리 YMCA(Ed & Ruth Lehman Family YMCA)로 개명된 롱몬트 YMCA(Longmont YMCA)에 50만 달러를 기부했다. 에드 레만의 부인 루스 레만은 2000년에 사망했다. 이들의 아들 딘 레만은 “우리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그들이 프로젝트에 집중하도록 돕는 일에 탁월했다"라면서 "아버지가 직접 관여했던 것 중 하나는 FAA 시설을 롱몬트에 도입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는 공공 안전, 교육, 고속도로와 교통에 관심이 많았다"라고 덧붙였다.

    2009년 5월에 레만 커뮤니케이션즈는 6만 평방 피트의 최첨단 인쇄 시설을 버트우드(Berthoud)에 개설했으며, 이 곳에서 타임즈 콜, 리포터 헤럴드 및 기타 지역 신문이 지금까지 인쇄되고 있다. 2011년 1월 레만은 데일리 카메라(Daily Camera)를 발행하는 프레리 마운틴 출판사(Prairie Mountain Publishing)에 레만 커뮤니케이션즈를 매각했다. 프레리 마운틴 출판사 대표 알 만지(Al Manzi)는 한 인터뷰에서 “리만은 콜로라도 신문의 전설이자 콜로라도 저널리즘의 창시자"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프레리 마운틴 미디어가 2011년에 레만 그룹을 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정말 운이 좋았고, 우리 팀에 재능이 뛰어난 직원들을 영입할 수 있었다. 에드의 유산은 계속될 것이다"라고 만지 대표는 말했다.

    은퇴 후에도 레만은 계속해서 신문에 칼럼을 쓰고, ‘언론과의 회전: 출판가의 여정’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발간했다. 덴버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는 동안에는 일주일에 40시간씩 뉴스 리포터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는 ‘대학에서 실습을 한 것과 같았다’라고 자서전에 적고 있다. 졸업 후에도 연방 관청, 화재, 범죄, 법원을 취재하면서 신문사에서 계속 일했다. 그의 보도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제기한 민사 소송에서 2,500달러를 배상하기도 했다. 1948년, 레만은 덴버 대학교 법대에 입학했고, 이에 대해 ‘나는 법과 저널리즘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라고 쓰고 있다. ‘두 영역은 큰 유사성이 있다. 두 가지 모두 글쓰기와 인터뷰 그리고 엄청난 양의 준비를 필요로 한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레만이 덴버에서 지방검사로 재직하는 동안은 언론을 외면했다. 루스와 함께 변호사 개업을 했고, 1954년에는 콜로라도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3년 뒤 롱몬트로 이사한 것에 대해 레만은 ‘나는 훌륭한 신문이 없이는 훌륭한 공동체가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가끔 신문사 일이 달콤했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힘들 때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타임즈-콜의 편집자를 지낸 다나 코필드(Dana Coffield)는 "레만은 자신의 일과 공동체를 사랑했기 때문에 85세까지 일했다. 그는 우리 모두를 위해 신문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라고 레만의 직업 윤리에 대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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