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의 수녀 최 레티씨아의 삶과 그림 이야기

   
   
팔십이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그림 전시회를 연다는 것만으로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데, 여기에 60년째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카톨릭 수녀라는 수식어가 하나 더 붙으면서 더욱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주인공 최 레티씨아 수녀를 만나 보았다. 최 수녀는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는 성 프란시스코 수녀회 (St. Francis of Perpetual Adoratio) 소속으로, 덴버와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한인성당에서 사목을 했었다. 은퇴 후에는 강정화 아트 스튜디오의 회원으로 8년째 그림을 그려 오고 있으며 강정화 화백의 강력한 권고로 오는 8일 전시회를 추진하게 되었다.

    강 화백은 "최 레티씨아 수녀님에 대해 굉장히 자랑스러운 것은 그 연세에도 불구하고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수년 동안을 꾸준히 계속 나오고 계시다는 겁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 하시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고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수녀님의 연세에 따른 연륜과 평생을 수도 생활을 하셔서 그림에 특별한 메시지가 담겨 있어요"라며 "또 수도자이시면서 하느님께 부여받은 재능을 꾸준히 갈고 닦으셨다는 점이 굉장히 훌륭하다고 생각되요. 그 갈고 닦으신 것을 혼자만 갖고 계시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나눈다면 더욱 의미가 커지겠지요. 그래서 강력하게 전시회를 추천 했습니다. 이번 전시는 아마도 수녀님 본인의 중간 평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행사를 함으로 해서 좀 더 알차게 삶의 흔적을 돌아보고, 생활을 들여다 보는 메시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추천사를 들려주었다.

    “아니요, ‘전시회’다 뭐 그런 거창한 거로 이름을 붙이면 안되요. 그냥 그림들을 벽에다 죽 붙여 놓고, 그 동안 도움 주셨던 분들 모시고 함께 보는 그런 거예요.” 최 레티씨아 수녀는 한사코, 최선을 다해 인터뷰를 피하려고 했다. “이제는 장례식 밖에 남은 게 없는데, 강 선생님이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하시고, 이렇게 인터뷰를 하게 하면…” 시끄러워지고,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그 동안의 삶의 방향과 결이 다르기 때문인 듯 했다. 하지만 구도자이자 노 현자의 지혜와 향기로 지면을 채우고 싶은 기자의 욕심에 멈추지 않는 질문으로 최 수녀를 ‘괴롭혔다.’ “한 세 살 정도였던 것 같아요. 아직 젓가락질은 못하고, 숟가락질만 할 때였죠. 밥상에서 아버지랑 같이 밥을 먹는데 다리도 쭉 뻗고 앉아서, 엄마는 김치를 찢어서 얹어주시고, 그렇게 밥을 먹는데 밥풀을 잔뜩 흘린 거 같아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어머, 장래 우리 최 수녀님이 이렇게 밥을 먹으면 안되는데…' 라고 하신 말씀이 내 머리에 꽉 박힌 거예요. 아버지께서는 농담으로 하신 말씀이신데 ‘나는 수녀가 되야 하는 건가 보다’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를 않았고, 그만 수녀원에 가게 되었어요.”라고 회고했다.

    어린 시절 최 수녀는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음악을 좋아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던 거예요. 유명한 음악가가 있는 집안은 아니지만 다들 소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가족들이 가끔 모여서 노래를 했었어요. 유행가는 할 줄 모르고, 가곡 같은 것을 한번씩 해보고, 그러면서 같이 웃고, 즐거운 시간을 많이 가졌었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독창을 많이 시키더라고요. 학교에서도 그랬고, 수녀원에서도 기도할 때 선창을 항상 제가 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나이가 있으니까 목이 좋지 않아서 이제 안 되요.”학창시절 내내 아름다운 목소리와 음악적인 재능으로 늘 솔로 파트를 맡았고, 유치원 소임을 하면서는 아이들하고 피아노도 치고, 노래를 했었다.

    레티씨아 수녀는 그림에 대한 재능이 발견된 것도 유치원 일을 하면서였다. "유치원에서 이런저런 꾸미기를 할 때 선생님들이 잘 못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좀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해주면서 소질이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우연히 한 한인 여성분을 방문했다가 그녀가 그린 그림을 보면서 갑자기 영혼을 울리는 듯한 질문을 하게 되면서부터다.  "내가 그림을 그려도 될까?”수녀로서의 한달 월급이 50달러였는데, 한 달에 40달러인 미술학원을 찾았고 그렇게 그림을 시작했는데 6개월 만에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 그런데 마침 강정화 화백이 스튜디오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강정화 화백은 “수녀님이 계심으로 인해서 우리 반의 인간적인 공기가 정화됩니다”라고 최 수녀와 함께 하는 즐거움을 표현했다.

    레티씨아 수녀는 “원하는 색깔이 나올 때 그 기쁨은 말로 표현 못하는 기쁨이예요”라며 그림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함께 생활하시는 40명의 할머니 수녀들에게 최 수녀는 항상 그림을 보여드린다.“노인이 된 분들을 위해서 뭘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시작한 일인데, 이제는 할머니 수녀님들이 먼저 “오늘은 뭘 그렸어?”하고 물어보며 좋아하세요 라며 함께 나누는 즐거움을 들려주었다. 그림을 그리다 한계에 부딪칠 때에 대해 최 레티씨아 수녀는 “삶과 그림이 똑같아요. 어렵다고 주저 앉지 말고, 한계를 넘어가는 거예요. 나는 성격이 아등바등 하지를 않아서 공부를 일등을 못한 거 같아요. 낙제만 안 하면 되는 걸로 생각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삶과 공부는 다르다고 봅니다.” 최 수녀는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면서 사는 게 최고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려움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바등바등 하거나, 욕심을 내면서 이래야 하는데, 저래야 하는데 하거나, 탈피하려고 해도 그게 안되고 불화만 생겨요. 하루하루 겪어 가는 것에 불만을 갖지 않고 감사하면서 받아들이면 나도 편하고 이웃도 편하고 순리대로 나가게 되요. 순리를 거스르면 아무 것도 안되더라고요, 내 경험으로 그래요”라고 삶의 지혜를 들려주었다.

    “이렇게 내 생애를 보니까, 모든 게 다 쉬웠어요. 어려움에 얽매이지를 않고, 어려운 거를 통해서 오히려 쉽게 살더라고요. 어려워도 불만이 없었어요. 마음이 어떻게 이렇게 되나, 이거는 내 마음대로 된 거 같지 않아요. 예수님하고 같이 있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겠어요. 하여튼 나는 못하는 게 많았지만 남의 밑에 수그러지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영어를 못하는 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전혀 지장이 없잖아요”라며 “무난하게 여기까지 온 게 대견해서 저녁에 잘 때 내 자신을 도닥이면서 “장하다, 이렇게 살아준 게” 그렇게 인사를 해요”라며 최 수녀는 어려움을 이겨낸 방법을 나누어 주었다.  최 레티씨아 수녀는 최근 미국 전체 수녀원 연합체에서 그 동안 신자들을 돌보았던 사목활동과 은퇴 후에도 그림을 그리며 재능을 발휘하는 것에 대한 상도 받았다. 가늘고 여린 외모와 달리 힘찬 터치와 색감을 보여주고, 고요한 음성으로 가장 담백한 삶의 순리를 들려주는 최 레티씨아 수녀는 “제발 거창한 사람 만들지 마세요”라고 마무리 인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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