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은 개띠해라 개에 관한 이야기하나 하려고 합니다.겨울에 눈이 오면 동네아이들도 눈에 뒹굴며 좋아하지만 덩달아 함께 뛰노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동네 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개들은 눈밭에 가면 저리도 좋아할까? 우연하게 이 질문에 대해 어떤 사람이 한 말이 자꾸 맘에 걸립니다. 제가 아는 상식으로는 개는 구조적으로 찬 것을 잘 견디는 발바닥을 가지고 있어서 눈이나 얼음위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개가 눈에서 뛰는 이유는 발이 시려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말이었습니다. 개가 발이시려 눈위에서 뛴다는 상상도 그런 관심도 기울여 본적이 없었는데 그런데 자꾸 이말이 걸립니다. 어! 정말 그럴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좋아서가 아니라 발이 시려서 발이 고통스러워 뛴다는 말인데 그렇게 생각하고 눈위를 뛰다니던 개들을 생각하니까 갑자기 마음이 아파졌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끌고와 돌로 쳐죽이려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돌을 들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간음한 여인 또한 스스로의 수치심과 죄책감,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불행한 처지 어쩌면 그 여인 스스로도 자신을 용납하고 싶지않은 깨어진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들이 돌을 들고 그 여인을 내려치려는 살기 등등한 그 현장에서 땅바닥에 뭐라고 쓰시고 잠시 듣기만 하셨습니다. 모든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은 이것을 굉장히 궁금해 하며 많은 추측을 해봅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하시고 잠시후에 하실 말씀을 그곳에 적으셨을까? 사랑,용서, 아니면 돌을 든 자들의 모든 것을 아셔서 그들의 죄의 내용들-간음, 도둑, 사기, 우상, 거짓-을 쓰셨을까? 저는 오늘 눈위에서 개들이 뛰는 이유가 즐거워서가 아니라 발이 시려서란 생각을 해보면서 그것이 맞던 틀리던 누군가를 이해하고 사랑하려면 전혀 해보지 않았던 생각을 시작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쓰신 글이 혹시 “개들이 눈위에서 뛰는 이유는 좋아서가 아니라 발이 시려서이다”라고 쓰시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엉뚱한 상상이지만 사랑과 용서는 이런 눈이 열릴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평생 살아오면서 목사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 때론 이웃이나 친구로써 실수를 저지를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부족한 성품 때문이기도 하고 어떤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도 있었지만 정말 생각하면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은 상대방을 오해하고 저지른 잘못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때 저만 보면 째려보고 뭔가 무시하는 듯 쳐다보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어떤 문제로 부딪힐 때에 그 친구에게 화를 내며 “야 임마, 넌 도대체 왜 나만 보면 그렇게 기분나쁘게 째려보냐”하며 따지듯이 물었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자기는 한번도 나를 그렇게 쳐다본 적도 없었고 안좋은 감정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그 다음말이 저를 참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때서야 그 친구가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아 니가 오해했구나. 내가 너를 째려보거나 무시한 게 아니라 내 눈이 좀 상태가 안좋아서 사람이나 사물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초점이 잘 안잡히는데 옆으로 비껴보면 초점이 맞아서 그래서 모든 것을 째려보는 것처럼 보게 된거야. 니가 오해했구나.”저는 그 친구가 가지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한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기에 그 친구를 늘 오해하며 지냈던 것입니다. 한번은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 쉬려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권사님 한 분이 화가 나셔서 전화를 하신 겁니다. “목사님 오늘 왜 눈을 피하세요? 무슨 감정있으세요?”조금 황당하고 뜻밖의 강한 항의에 다시 여쭤봤습니다. “권사님, 저는 권사님에게 아무 감정도 없을 뿐 아니라 제가 권사님을 피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요. 왜 권사님이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요?”차근히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예배 후 목사님하고 손잡고 인사도 하고 싶고 뭔가 하고 싶은 말씀도 있으셨는데 그날따라 오랜만에 나오신 성도가 있어 그분과 더 많이 대화를 하고 집중하다보니 이 권사님의 눈길을 놓쳐버린 것이었습니다. 권사님의 말씀을 듣다보니 오늘 항의하는 권사님의 서운한 마음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5-3=2 / 2+2=4>
‘5-3=2’란 산수에서 이런 사랑공식을 볼수 있답니다. 오(5)해도 세 번(3) 생각하면 이(2)해가 된다는 말입니다. ‘2+2=4’란 공식에서는 이런 이(2)해를 계속하면 사(4)랑할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해한다는 말의 영어 ‘Understand’란 단어는 ‘~~아래 선다’는 뜻입니다. 바꿔 표현해 본다면 ‘그 사람 아래 서본다’또는 ‘그 사람의 입장에 서본다’는 뜻을 우리는 이해라는 단어로 표현해 봅니다. 이렇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반복할 때 거기서 사랑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어떤 경험들이 우리의 눈을 가려 어떤 사람안에 있는 정말 소중한 것과 진심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란 말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통하여 말을 안해도 다 알수 있다는 뜻입니다만 이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사랑하기 위해 물어봐 주시고 또 말해주시고 그리고 마음을 열고 대답해 주세요. 사랑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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