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이란 뭘까요? 세 사람이 건축 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모두 삽으로 땅을 파고 있었지요. 첫 번째 일꾼은 의욕도 없고 피곤해 보였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그에게 ‘지금 뭐하고 있죠?’ 묻자, 그는 ‘보면 몰라요? 구덩이를 파고 있잖소’ 짜증스럽게 대답합니다. 두 번째 일꾼은 첫 번째 일꾼보다 조금 기분이 나아 보였습니다. 같은 물음에 그는 ‘나는 지금 기초를 놓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기쁨과 생동감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뭐하고 있느냐는 물음에 그는 ‘나는 지금 멋진 집을 짓고 있습니다’라고 밝게 대답했습니다. 인생은 집짓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하루 불평과 곤고함으로 마지못해 집을 짓고 살고, 어떤 사람은 하루하루 감사와 기쁨으로 집을 짓고 삽니다. 예수님은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 있고,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 있으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칠 때 그 집의 가치를 알 수 있다”(마7:24-27)고 말씀합니다. 잠시 후 우리 인생의 집(육신의 장막)은 누구나 다 무너집니다. 그때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지요. 이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 이였는지, 어리석은 사람 이였는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5:1) 이 소망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2천 년 전 유대 땅 골고다언덕 십자가위에 못 박혀 고개를 떨구고 ‘다 이루었다’(Paid in full 요19:30) 하시며 죽음으로 인간의 모든 죄 값을 다 담당하신 속죄양 예수 그리스도는 3일 후 새벽 무덤 문을 활짝 열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나도 부활할 줄로 믿고 이 부활을 전하고 이 부활의 소망으로 어떠한 고난과 절망 속에서도 하루하루 감사와 기쁨으로 사는 것이 크리스챤 Life입니다. 크리스챤의 가장 큰 덕목은 감사와 기쁨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왜? 부활의 소망 때문입니다. 이 세상 역사 속에 있는 모든 종교와 모든 위인이 다 죽음 앞에 굴복하고 죽음의 지배를 받고 죽음을 이긴 적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고, 죽음 문제를 해결하고,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수년전 저 인도에서는 <고우타마싯타르타 석가모니>의 뼈를 발견했다고 썩어빠진 뼈 한 토막 앞에 온 국민이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것을 해외토픽에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 기독교가 예수의 뼈를 발견했다면 나는 결코 예수를 믿지 않을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뼈는 없습니다.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는 최초의 사람 아담 안에서 다 죽게 되었습니다. <아담>이라는 말은 이름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라는 뜻의 단수형복수입니다. 나무 하면 그 나무속에 모든 나무가 다 들어있듯이, 동물 하면 그 동물속에 모든 동물이 다 들어있듯이, 아담하면 그 속에 모든 사람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아담(사람)이 죄인이 되어 죽음의 병에 걸렸기에 사람이 다 죽게 된 거지요. 그래서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갑니다. 그래서 울고 태어납니다. 인생의 눈물 원천이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소망이 있습니다. 죽지 않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0-21) 한분 예수 그리스도가 이 인류의 절망을 해결 하셨습니다. 어떤 병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에이즈도 그 바이러스를 죽일 수 있는 항체를 발견만 하면 다 정복되듯이, 온 역사에 사망이 왕 노릇하고 모든 인류가 그 앞에 두려워 벌벌 떨지만, 예수 그리스도 주님이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첫 항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내 몸속에 흐르면 모든 사망의 바이러스가 사라지고 죽어도 사는 것입니다. 그게 부활입니다. 너무너무 위대하고 너무너무 엄청난 진리이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바치고 순교하면서 이 사실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위해 기꺼이 죽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이것이 만약 누가 인위적으로 조작한 이야기라면 그 똑똑한 <토스토에프스키>가 “부활”이라는 책을 쓸까요? 왜 쉑스피어, 에디슨,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들이 그걸 믿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확실히 부활하셔서 오늘도 살아계시며 역사를 다스리시고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치료하시고 우리를 살리시는 영원한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딱 두 곳에 뿌리를 두고 삽니다. 하나는 생명의 뿌리요, 하나는 사망의 뿌리입니다. 몸은 죽었어도 뿌리가 살아있으면 그 나무는 봄에 다시 꽃이 피고 새싹이 나옵니다. 그 나무는 죽은 나무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몸이 산 것 같아도 뿌리가 죽었으면 그 나무는 결국 죽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 예수 믿으면 나도 부활합니다. 죽어도 삽니다. 이 소망의 빛만 있다면 어떤 세상의 어두움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 소망 때문에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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