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양까지, 왜 3년이나 걸렸나

          지난 23일 세월호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이후 약 3년 만에 건져 올린 것이다. 이와 관련해 세월호 인양 음모론도 확산하고 있다. 일부 유가족과 네티즌 등은 본(本) 인양 작업이 시작된 지 하루 만에 선체가 수면에 오르자 “이렇게 간단한데 왜 3년이나 걸렸느냐”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인양 의지가 없어 미뤄졌다’‘박 전 대통령이 인양을 막았고, 박 전 대통령이 파면되자 해양수산부가 6일 만에 인양을 발표했다’‘박 전 대통령 검찰 수사가 이뤄지자 관심을 돌리려고 인양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민주당과 국민의당도 이날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세월호 인양을 미뤄온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는 논평을 냈다. 정말 정부는 3년간 손을 놓고 있다가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 파면 결정을 내리자 비로소 인양에 나선 것일까.

의혹1> 정부가 세월호 인양을 일부러 미뤄 3년 만에 시행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인양이 이뤄지기까지 사건을 시간순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사고 발생
▶ 2014년 11월11일
정부, 실종자 수색 작업 중단
▶ 2015년 4월22일
정부, 찬반 논란 끝에 선체 인양하기로 공식 결정
▶ 2015년 5월22일 세월호 인양 국제입찰 공고
▶ 2015년 8월5일
해수부, 상하이샐비지와 최종 계약
▶ 2015년 8월19일
상하이샐비지, 인양 작업 착수
▶ 2016년 11월11일
크레인 방식에서 바지선 방식으로 변경
▶ 2017년 3월15일
해수부 “세월호 이르면 다음 달 초 인양”
▶ 2017년 3월19일
해수부 시험 인양 시도했으나 실패
▶ 2017년 3월22일
해수부 시험 인양 뒤 본 인양 시작
2017년 3월23일 세월호 수면 위로 모습 드러내

세월호 침몰 초기 정부는 선체 인양보다 실종자 수색 작업을 우선시했다. 유족들의 요구이기도 했다. 7개월 동안 실종자 수색에만 매달렸다. 그런데도 ‘왜 3년씩이나?’라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사건 일지를 보면 세월호가 침몰한 뒤 3년 만에 다시 올라온 것은 맞지만, 인양에 착수한 2015년 8월부터 계산하면 1년7개월 만에 본 인양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는 2015년 4월22일 “세월호 인양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며 “업체 선정을 거쳐 이르면 9월부터 인양 작업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실제로는 그보다 조금 빠른 8월19일 인양 작업이 시작됐다. 당시 중대본은 “업체 선정 이후 12개월~18개월 안에 인양을 마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그러나 “기상 상태가 예상보다 나쁘거나 인양 과정에서 부분적 실패가 빚어지면 18개월에서 24개월까지도 걸릴 수 있다”고 발표했다. 업체 선정 시점부터 인양까지 최장 2년이 걸릴 수 있다고 내다본 것이다. 결과적으로 상하이샐비지로 업체가 선정된 시점부터 본인양을 하기까지는 1년7개월 걸렸다. 그동안 해수부가 기술적 문제, 기상, 조류, 해저면 상태 등을 이유로 수차례 인양 완료 시점을 연기하고 인양 방식 변경까지 이뤄졌지만, 결과적으로 처음의 예상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또 해수부 측은 2016년 11월 인양이 늦어진다고 발표하며 “내년 3~5월에 세월호가 목포항에 거치될 것”이라고 밝혔다. 3월 즈음에 세월호 본 인양에 착수하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 파면이 결정되기 훨씬 전에 이미 계획된 일이었다.

의혹2> 인양 의지 없는 정부가 일부러 기술력 없는 회사를 택했다?

         세월호 인양 업체로 중국 상하이샐비지를 선정한 것을 놓고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월호를 인양할 의지가 없었던 박근혜 정부가 기술력과 경험이 떨어지는 업체를 의도적으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정성욱 4·16가족협의회 인양분과장은 23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해수부가 기술력 없는 회사를 데려와서 인양을 시작했던 게 가장 큰 문제”라며 “정부가 처음부터 인양할 생각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입찰에 참가할 수준의 기술력이 없는 회사”라고도 했다. 이철조 해수부 세월호인양추진단장은 “수긍할 수 없다”며 그간 제기된 의혹을 반박했다. 실제로 상하이샐비지의 규모와 실적이 뒤처지진 않는다. 상하이샐비지는 1951년 설립된 중국 국영기업으로, 연간 매출 규모가 3000억원이 넘으며 전문인력을 1400명가량 보유한 대형 해양 구난업체다. 1900건 이상 선박 구조 작업과 1000건 넘는 잔해제거 작업, 2만t의 해상 유출 기름 제거 등 실적을 보유한 업체로 알려졌다. 입찰이 이뤄지던 2015년 7월에는 ‘중국판 세월호’라고 불린 유람선 ‘둥팡즈싱’호를 양쯔강에서 건져냈다. 2015년 5월부터 6월까지 이뤄진 입찰 공고에는 네덜란드 스미트(SMIT)와 스비처(Svitzer), 미국 타이탄(Titan) 등 세계 선박 인양업계 ‘빅 3’를 포함해 국내외 27개 업체가 7개 컨소시엄을 구성해 참가했다. 당시 해수부는 우선협상대상자 1순위로 상하이샐비지 컨소시엄을 선정했고 2순위로 중국 옌타이샐비지 컨소시엄을, 3순위로 타이탄과 스비처 컨소시엄을 선정했다. 상하이샐비지가 851억원이라는 낮은 입찰가를 적어낸 것이 인양 업체로 선정된 결정적 이유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그러나 이철조 단장은 “세월호 인양 입찰에서 기술과 가격의 평가 비율은 9대1이었다”며 “다른 사업보다 기술 평가 비율이 높았다”고 했다. 물론 상하이샐비지가 입찰 업체 중 기술 점수가 가장 높았던 것은 아니다. 해수부가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상하이샐비지의 기술점수는 2등이었다. 스미트가 기술점수에서 1등을 했다. 스미트가 적어낸 가격은 1485억원. 그러나 스미트는 해수부가 책정한 예산이 너무 적다고 판단해 입찰 보증금을 예치하지 않았다.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이철조 단장은 또 “다른 회사들은 장비를 대여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상하이샐비지는 장비를 대부분 자체 보유하고 있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기술 평가표를 공식적으로 공개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자칫 평가 결과가 공개될 경우 업체들이 평판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소극적으로 나설 우려가 있어 대외 비공개를 원칙으로 입찰 공모를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단장은 “대외적으로 공개하진 않았지만 2015년 업체 이름을 가리는 조건으로 국회의원들이 기술 평가표를 열람했다”고 전했다.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국내 3대 조선 업체는 아예 입찰에 참여하지 않았다. 인양 전문 업체가 아닌 데다 인양에 실패할 경우 국민적 비판이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시행착오를 겪기는 했지만 상하이샐비지는 세월호 선체를 목표 수준인 수면 위 13m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인양할 능력이 없는 기술력이 낮은 업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다.

의혹3> 그렇다면 왜 1년7개월이나 걸렸나?

        세월호는 선체 자체 무게만 6825t이다. 여기에 최대 허용치를 1000t이나 초과한 2143t의 화물이 실려 있었다. 화물을 포함한 선박 무게만 9000t에 육박한다. 여기에다 선박에 들어찬 바닷물과 해저 퇴적물까지 포함하면 끌어올려야 할 전체 무게가 1만t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정도 무게의 선체를 통째로 인양하는 것은 전례가 없었던, 세계 최초의 일이다. 수개월 만에 뚝딱 해치울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해수부에 따르면 2000년 이후 전 세계에서 사고로 침몰한 7000t급 이상 선박은 모두 15척이다. 그 중 14척이 인양됐다. 2012년 이탈리아 해안에서 침몰한 콩코르디아호는 연안에서 좌초해 선체의 절반만 수면에 잠긴 상태에서 끌어냈다. 나머지는 모두 2~8조각으로 선체를 해체한 뒤 인양됐다. 바닷속에 완전히 잠긴 대형 선박을 동째로 인양한 사례는 없었던 것이다. 총 중량이 1만t이 넘고 길이가 145m에 달하는 초대형 선박을 해체 없이 인양한 것 자체가 세계 선박 인양사에 남을 만한 일이다. 이 때문에 해수부 관계자가 “우리는 지금 누구도 가보지 않았던 길을 걷는 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선박의 중량만 문제가 아니었다. 세월호가 침몰한 해역은 물살이 거세고 빠르기로 악명 높은 ‘맹골수도’이다. 서해는 동해나 남해보다 유속이 빠른데 평균 유속이 3노트 정도이다. 그런데 맹골수도는 최고 6노트로 서해에서도 유속이 가장 빠른 해역이다. 이처럼 빠른 유속이 세월호 침몰의 한 원인이기도 했다. 그러니 인양 작업도 순조로울 리 없었다. 기상 여건도 맞아떨어져야 했다. 밀물과 썰물의 격차가 작은 소조기만 작업이 가능한데, 소조기는 보름에 한번 찾아온다. 여기에 파고 1m, 풍속 10㎧ 이내의 기상 여건이 3일간 지속돼야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이런 기상 상태인지는 작업 당일이 돼봐야 알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사전 작업이 왜 올해 3월에야 완료됐을까. 중간에 인양 방식을 한번 바꾸는 등 시행착오 때문이다. 상하이샐비지가 제안한 인양 방법은 해상 크레인과 선박건조용 구조물인 ‘플로팅 독(Floating Dock)’, 그리고 ‘철제 리프팅 빔’을 이용한 방식이다. 선체에 직접 와이어를 연결해 들면 물속에 오래 잠겨 취약해진 선체가 파손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을 가마에 태워 들어 올리듯 선체 아래쪽에 배를 떠받쳐 들어 올릴 리프팅 빔 33개를 깔고 이 리프팅빔을 강철 줄(와이어)로 크레인에 연결해 조금씩 조금씩 끌어올리는 것이다. 선체를 최대한 보존하려는 방법이었다. 이를 위해 선체 내부에 압축공기를 넣어 선체를 약간 들어 올린 뒤, 선체 아래쪽에 땅을 파서 철제 리프팅 빔을 설치한다는 계획이었다. 이후 와이어를 대형 해상 크레인에 걸고 줄을 당겨서 플로팅 독에 실은 뒤 항구까지 운반하려 했다. 크레인은 각도 조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작업 반경이 넓고 작업 위치를 신속하게 옮길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겨울에 바람이 세게 불면 위험하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상하이샐비지는 늦어도 2016년 가을까지는 작업을 끝내려 했다. 그러나 사전 작업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2015년 8월19일 상하이샐비지 소속 중국인 잠수사 1명이 수중 작업에 착수했지만 기상 상황이 좋지 않아 약 10분간 수중 상황만 확인하고 철수했다. 9월에는 배 안에 남아있는 기름을 제거하는 작업 때문에 한 달이 지연됐다. 기름이 주로 연료탱크에 있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선체에 진입해 살펴보니 기름은 화물칸까지 퍼져 있었다. 잠수사들이 흡입호스를 이용해 수작업으로 기름을 걷어내야 했다. 선체 내부에 압축공기를 주입하는 작업도 공기탱크 수가 계산보다 적어 예상보다 1개월 더 걸렸다. 땅을 파서 리프팅 빔을 설치하는 작업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지연됐다. 선체, 특히 선미 부분이 박힌 해저 지형이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고 불규칙한 퇴적층이어서 예상보다 굴착 작업이 어려웠던 것이다. 리프팅 빔이 세월호 선체 밑에 처음 깔린 것이 지난해 7월 29일이었다. 세월호 앞쪽을 약 10m 들어 올려 선수 리프팅 빔 18개를 동시에 삽입했다. 선미 쪽은 12월 18일에야 선체 밑 굴착을 마친 끝에 리프팅 빔 10개를 설치 완료했다. 와이어를 대체하는 빔 5개도 선수 빔 앞쪽에 추가로 보강해 인양 전 공정의 75%를 차지하는 리프팅 빔 설치가 완료됐다. 이 시점이 지난해 12월25일. 원래 계획보다 4개월 늦어졌다. 그러던 중 겨울이 되고 바람이 강해지며 해상 크레인을 이용한 인양이 어려워졌다. 결국, 겨울철 강한 북서계절풍이 부는 우리나라 날씨를 고려해 우뚝 선 크레인보다 바람의 영향을 덜 받는 납작한 바지선 방식으로 인양하기로 지난해 11월 결정했다. 해상 크레인을 ‘잭킹 바지선(유압 펌프로 와이어를 잡아당기는 장비가 장착된 바지선)’으로, 플로팅 독을 ‘반잠수식 운반선’으로 대체했다. 3만8000t과 2만5000t짜리 초대형 바지선 두 척을 동원했다. 바지선이 양쪽에서 잡아당겨 들어 올리는 방식이다. 계절이 바뀌고 풍속이 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해상 크레인 방식을 쓸 수도 있었지만, 이미 인양이 수차례 미뤄진 상황에서 최대한 빨리 인양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인양 방식 변경을 발표한 지난해 11월 11일 해수부는 “내년 봄쯤 세월호를 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기도 했다. 선체 밑 33개 리프팅 빔을 바지선 2대에 와이어로 각각 연결하는 작업도 잠수부들이 물 밑으로 들어가 하나하나 손으로 해냈다. 강철 다발을 꼬아 만든 케이블 66가닥을 33개 리프팅 빔과 물속에서 모두 연결하는 데 또다시 2개월 이상 걸렸다. 이달 12일 바지선이 현장에 도착해 17일에 세월호와 연결된 강철 케이블과의 연결이 끝났고 비로소 들어 올릴 준비를 마쳤다. 세월호 선체를 끌어올려 실을 반잠수식 선박도 도착했다. 이에 해수부는 지난 18일 오후 “장비 점검 결과가 양호하고 기상이 허락한다면 19일 세월호 인양을 시도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랬더니 “21일로 예정된 박 전 대통령 검찰 출석 이슈를 희석시키려는 의도 아니냐”는 음모론이 나왔다. 그러나 해수부가 인양 시도일을 19일로 잡은 건 그날이 소조기가 시작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상하이샐비지로서도 작업을 일부러 늦출 이유가 전혀 없었다. 작업 기간이 길어질수록 손해를 보기 때문에 오히려 최대한 빨리 인양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상하이샐비지는 1단계 작업(잔존유 제거와 유실방지)이 끝난 뒤 213억원을 받았지만, 2단계 작업(인양을 위한 접안 등)이 지연되면서 2차 대금(468억원)을 못 받게 되자 우리 정부에 유동성 부족을 호소하기도 했다. 작업이 당초 계획보다 늦어지면서 이미 상하이샐비지는 1000억원 이상 적자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의혹4> 천안함 인양은 1개월도 걸리지 않았는데…

          일각에서는 2010년 북한 어뢰에 폭침된 천안함은 인양 결정이 내려지고 22일 만에 인양했다는 점을 들며 세월호 인양과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천안함 인양에 나섰던 군과 민간 전문가들은 세월호 인양은 천안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작업이라고 입을 모은다.  천안함과 세월호는 무게부터 차이가 크다. 천안함은 1220t가량이었지만, 세월호는 총 1만t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안함 무게가 세월호의 10분의 1 수준인 셈이다. 또 천안함은 폭침으로 함미·함수가 분리돼 두 번에 나눠 인양할 수 있어 작업이 상대적으로 쉬웠다. 선체가 두 동강 난 상태였기 때문에 크레인으로 들어 올리며 자연스럽게 물이 빠져 무게가 줄었다. 하지만 세월호는 별다른 외부 손상이 없어 자연 배수에 어려움이 있는 상태다. 또 천안함은 폭침 직후 인양이 결정됐지만, 세월호는 인양 결정에 1년 이상이 걸렸다. 물속에 오래 있었던 만큼 선체가 부식됐을 가능성이 있고, 인양 과정에서 선체 부분이 온전히 버티지 못할 수 있어 작업이 어려워졌다. 해역의 환경 차이도 크다. 천안함 폭침 장소인 백령도 앞바다 유속은 최대 4노트인 반면, 세월호가 침몰한 진도 앞바다는 최대 유속이 6노트이다. 또 천안함은 25m 해저에 가라앉았지만, 세월호는 37~44m 깊이에 잠겨 있었다. 해수부 관계자는 “일부러 인양을 늦추거나 대통령 파면에 맞춰 시기를 조정했다는 추측은 낭설”이라고 했다. 관계자는 “워낙 어려운 작업이라 시행착오가 많았다”며 쉬운 작업이 결코 아니었다고 했다. 인양 시점에 대해서도 “2015년 8월 시작된 사전 준비 작업과 장비 동원을 올해 3월 마쳤다”며 “이후 기상이 좋은 시기가 와서 인양에 착수한 것이지 정치적 고려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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