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검결과, 화학국 분석 일치”

         말레이시아 보건당국이 북한의 김정은의 이복형인 김정남(사진)의 사망 원인이 신경 작용제 VX 중독이라는 부검 결과를 확인했다. 사타시밤 수브라마니암 말레이 보건장관은 “김정남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신경 작용제가 매우 심각한 마비를 일으켜 피해자를 아주 짧은 시간 내 사망케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확인됐다”고 25일 밝혔다. 그는 “신경 작용제 VX에 고용량으로 노출될 경우 피해자가 매우 빨리 사망에 이를 수 있다”며 “이런 부검 결과는 김정남 시신에서 VX가 발견됐다는 말레이 과학기술혁신부 화학국의 보고서와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말레이 당국은 이날 화생방 장비로 중무장한 요원들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 투입해 VX 잔류 독소가 남아있는지 확인하는 대대적 수색과 제독 작업을 펼쳤다. 수브라마니암 장관은 현재까지 김정남 독살 현장인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의료진이나 승객들이 VX에 노출된 다른 사례는 보고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인 김정남은 지난 13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얼굴에 액체 공격을 받은 뒤 고통을 호소하다가 사망했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말레이 화학국이 부검 샘플을 분석한 결과 VX로 불리는 ‘에틸 S-2-디이소프로필아미노에틸 메틸포스포노티올레이트’가 사망자의 눈 점막과 얼굴에서 검출됐다는 잠정 결론을 담은 보고서를 지난 24일 제출한 바 있다. VX는 현재까지 알려진 독가스 가운데 가장 유독한 신경작용제로 수 분 만에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 이 독가스는 특별한 냄새와 맛이 없지만 호흡기, 직접 섭취, 눈, 피부 등을 통해 인체에 흡수되면 사린가스보다 100배 이상의 독성을 발휘한다. 국제사회는 유엔이 대량살상무기로 분류해 생산·보유·사용을 금지하기로 결의한 이 맹독성 물질이 김정남 독살에 사용된 정황이 드러나자 배후로 지목되는 북한을 향한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북한‘김철 VX 독살’과학성 부족
 정치적 망동 주장

       북한은 1일 지난달 말레이시아에서 사망한 사람이 김정남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외교여권을 소지한 북한인 ‘김철’이라는 입장을 되풀이하며, 그의 사망 원인을 독살로 몰고 가는 것은 정치적 모략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황당무계한 궤변, 위험한 정치적 망동’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아직 김철의 사망 원인조차 명백히 해명되지 못하는 때에 미국과 남조선 당국은 그가 ‘고독성 VX 신경물질’에 의해 독살됐다고 하면서 우리를 터무니없이 걸고 드는 망동을 부리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중앙통신은 ‘독살’됐다는 수사 결과 발표가 “황당무계한 궤변이고, 과학성과 논리성이 부족하다”며 그동안 발표된 수사 결과 내용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중앙통신은 “살인용의자로 체포된 여성이 위생실에서 손을 씻었기 때문에 무사하다는 것은 VX의 특징에 부합되지 않는다”며 “설사 VX의 해독제인 아트로핀을 미리 맞았다고 해도 살인용의자들은 쇼크상태에 빠졌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앙통신은 또한 “VX를 손에 바른 사람은 살고 그것을 발리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의 극치”라며 “사망한 김철의 입술에서 VX 성분이 검출됐다면 실어간 구급차와 경찰도 모두 중독됐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라고 주장했다. 중앙통신은 아울러 “구체적인 연구도 없이 단순하게 ‘VX’라고 결론하면 그것은 비과학적”이라며 “특히 일부 나라들이 이를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 한다면 그 후과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고 비난했다. 중앙통신은 오히려 이번 사건의 여성용의자가 한국을 방문한 사실이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남조선 당국자들이 그들에게 상기 물질을 쥐여보내지 않았겠는가 의심하는 것도 우연하지 않다”고 억지를 부렸다. 중앙통신은 “미국과 남조선 당국은 무작정 우리를 걸고들며 히스테리적인 반공화국 모략 소동을 벌이고 있다”며 “무분별한 책동이 공화국의 영상을 깎아내리고, 제도를 전복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려는 데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중앙통신은 그러면서 “남조선 당국이 분별을 잃고 우리 제도를 무너뜨리기 위한 정치적 음모책동에 계속 매달린다면 우리는 부득불 나라의 자주권과 존엄을 수호하기 위해 보다 강력한 자위적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정남 암살녀’방탄복 입고 법정에…
고의 살인땐 사형

        1일 오전 9시 반 말레이시아 셀랑고르주 세팡 치안법원. 중무장한 경찰 요원 200여명이 법원 안팎에서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는 가운데 10여대의 경찰 차량과 오토바이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법원 안으로 진입했다. 법원 청사 앞에 멈춰선 호송차에서 작은 체구의 젊은 여성 두 명이 내렸다. 북한 공작원들의 지시에 따라 지난달 13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김정남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베트남 여성 도안 티 흐엉(29)과 인도네시아 여성 시티 아이샤(25)였다. 두 사람은 이날 살인 혐의로 정식 재판에 기소돼 처음 법정에 섰다. 빨간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아이샤와 노란색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도안은 겁에 질리고 초췌한 표정이 역력했다. 둘 다 기습 공격 등에 대비해 방탄조끼를 착용하고 있었다. 현지 중국어 신문 중국보는 “범죄 피고인이 방탄복을 입고 법정으로 호송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보도했다. 인솔 경찰과 수갑 한쪽씩을 나눠 찬 두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경찰에 이끌려 2층 재판정으로 갔다. 세팡 법원 앞에는 국내외 취재진 300여명이 몰려들었지만 상당수는 법정 출입증을 받지 못했다. 이날 공판은 한 시간가량 진행됐다. 법정에는 베트남어·인도네시아어 통역, 쿠알라룸푸르 주재 인도네시아 대사 대리 등 양국 영사 업무 담당자와 변호사 등이 배석했다. 재판은 경찰 요청으로 비공개로 진행됐다. 말레이시아 검찰은 고의 살인범에 대해 무조건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한 형법 302조에 근거해 “유죄가 입증될 경우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주범으로 지목된 북한 국적 용의자 4명이 북한으로 도피했고, 흐엉과 아이샤는 “장난인 줄 알았다”며 살인 의도를 부인하고 있어 향후 법정 공방이 예상된다. BBC에 따르면 흐엉은 법정에서 공소장이 낭독된 뒤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냐’는 질문에 영어로 “이해는 했지만, 나는 죄가 없다(I understand but I am not guilty)”라고 소리쳤다. 흐엉의 변호사 셀밤 샨무감은 기자들에게 “그녀는 사형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소유 차량으로 평양으로 도주한 북한 국적 용의자 4명을 도와준 혐의로 체포된 리정철(47)은 증거 부족으로 조만간 석방돼 국외로 추방될 것이라고 말레이시아 동방일보가 보도했다. 리정철은 경찰 진술에서 4명의 용의자를 알지 못한다고 주장해왔다. 한편 김정남 암살로 비롯된 말레이시아와의 외교적 갈등을 풀기 위해 전날 말레이시아에 급파된 고위급 대표단은 이날 외부 출입을 하지 않고 북한 대사관에 머물렀다. 이들은 전날 기자회견에서 김정남 시신 인도와 리정철 석방을 요구했으며, 말레이시아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서도 같은 요구를 전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측의 반응은 싸늘했다. 사타시밤 수브라마니암 보건장관은 1일 브리핑에서 “그들의 요구가 무엇이건 우리의 대답은 ‘정해진 절차대로 한다’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자히드 하미디 말레이시아 부총리는 “사법 절차가 마무리된 뒤 이번 사건과 관련한 부검 보고서와 DNA 보고서, 화학 실험 결과, 공항 CCTV 자료 등을 국제 정보 당국들과 공유할 의향이 있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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