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명제에는 동의하면서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타부시하고 있다. 일과 속도와 성장이 행복한 인생과 성공의 잣대가 되어 버린 현대인들은 죽음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려 한다. 주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자를 끊임없이 보고 있고, 그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만 죽음을 깊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갑작스런 죽음을 보면서도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지 않는다면 이야 말로 어리석음이 아닌가? 필자는 장례식장에 오순도순 모여 있는 사람들이 죽음에 관해 깊게 생각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 그저 인사치례를 위해 봉투를 내밀고 한 끼 먹기에 바쁘고 사회의 변두리 얘기들 하기에 정신이 없다. 이것을 바꾸어내는 일이야 말로 우리 신앙인들의 사명이 아닐까?

         오늘의 물질중심주의 사고는 교회에까지 들어와 건강과 물질 풍요가 바로 하나님 축복의 유일한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나님과 동행함을 최상의 축복으로 고백하면서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죽음을 연장하여 이 땅에 머물고자 하는 것이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다. 게다가 삶은 밝음과 축복으로, 죽음은 어둠과 저주로 대비하여 죽음의 공포에 사로 잡혀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고 죽음은 단지 자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씀한다. 죽음은 삶의 일부분이며 죽음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삶을 완성한다.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죽음 앞에서 자신을 비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결코 성공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더욱이 기독교는 영생과 부활을 생명으로 여기는 종교가 아닌가? 참다운 신앙은 죽음을 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서 나온다. 기독교인들이 자주 암송하는 주기도에는‘나라가 임하오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곧 저 하늘보다는 이 땅의 문제 곧 이 사회의 정의, 평화, 생명문제에 본질적으로 더 관심한다. 기독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다. 그리고 이 죽음을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식이라는 예식을 통해 기억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사건은 모든 신앙인들이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바와같이‘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한’정치적 사건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죽음 이해는 사회정치적인 폭력과 깊이 연결되어 있고, 이 폭력적인 죽임에 대한 저항의 예식으로서 성찬식이 시작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에서 부활로 그리고 영생과 심판으로 갑자기 상승해버리는 성서의 얘기와 기독교 교리는 교회로 하여금 죽음 준비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와 종교 예식에 소홀하도록 한 일면이 없지 않다. 죽음의 예식과 관련한 가장 유명한 성서 구절은 한 구도자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청을 한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룬 다음에 선생님을 따르게 하소서.’이때 예수님은‘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명한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당시 악의 상징인 예루살렘 도시를 올라갈 때이다. 곧 자신의 죽음을 앞둔 매우 절박한 시기였다. 곧 자신을 따를 시간이 없음을 강조한 말이다. 이는 결코 부모의 장례를 소홀히 여긴 말씀이 아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장례식 가운데 하나의 매우 의미 있는 예식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두 자녀가 관 앞에서 작은 상자를 열었을 때 상자 안에서 한 마리의 호랑나비가 날아 올랐고 동시에 참석자들은 또한 미리 받은 종이봉투를 열자 수많은 나비들이 일제히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죽음이란 다름 아닌 인간이 번데기라는 육체의 탈을 벗고 영혼의 나비가 되어 하늘로 자유로운 몸이 되어 날아간다. 성서는 죽음을 이 땅의 육신이라는 장막 집을 벗고 하늘 본향 집으로 돌아가는 것에 비유한다. 죽음은 삶의 가장 큰 상실이 아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버리는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은 우리에게 거듭 말하고 있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지 말라.’고. 죽음의 가장 큰 교훈은 바로 삶인 것이다. 삶은 하나의 기회이며 거룩한 소명이며 아름다움이며 놀이임을 살아남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웰다잉이다. 몇 해가 지나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지 못해 괴로워하는 성도들이 있다. 단순히 죽음을 준비하는 일만이 아닌, 죽음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이를 교회와 가정 안에서 예전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가능하다면 필자는 오는 사순절과 재의 수요일로 시작되는 고난 주간에는 웰다잉의 예전을 유언서 작성하기, 나의 장례순서 만들기, 죽음 체험(관에 들어가기) 등을 통해 성도들과 함께 웰빙의 자리로 나아가는 기회를 갖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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