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부조가 보험 상품이 되기까지 상조회에 가까웠던 로마의 생명보험


중세의 길드, 생명보험에서 대물보험으로 확장시키다

     마을 공동체나 직업군을 중심으로 형성된 고대 로마 콜레기아의 전통은 중세에 들어서도 유사한 형태로 남았다. 중세에 들어 새롭게 생겨나기 시작한 조합은 길드(guild)로, 길드에 대한 최초의 기술은 779년 칼 대제의 문서에서 드러난다. 이 당시의 길드는 주연(酒宴)을 겸하여 산 제물을 바치는 종교적 모임으로 추정된다.
이밖에도 잉글랜드의 이나왕(Ina, 688~725)과 알프레드 대왕(Alfreds, 871~901)의 법전에서도 앵글로색슨어로 길드를 의미하는 게길란(gegilan)이라는 단어가 확인된다. 이후 에셀스탄 왕(Athelstans, 925~940) 시대에 제정된 런던 시민법(Judicia Civitatis Lundoniae)은 런던을 중심으로 한 길드의 규약집으로 조합원들의 체계나 의무, 손해 발생 시의 보상 등이 규정되어 있으며, 그 전문에 규약의 적용 범위를 “우리 우호 길드 내에서(among our ‘Frith gegildas’)”로 명시하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좀 더 익숙한 상인 길드의 경우 영국에서 가장 먼저 발생한 것으로, 이는 윌리엄 1세(Willam I, 1028~1087)의 정복 이후 노르망디와 잉글랜드 사이의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그 수가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에서 상인 길드 설립이 최초로 확인되는 것은 헨리 1세(Henri I, 1069~1135)에 의해 발급된 특허장이며 이후 길드의 숫자는 계속 증가해 에드워드 1세(Edward I, 1239~1307) 때에는 총 92개의 상인 길드가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중세 상인 길드와 수공업자 길드가 경쟁적으로 발달하면서 사망뿐 아니라 화재, 질병, 도난 등 조합원들이 각종 피해를 입었을 때 이를 보상하는 보험의 기능이 확장되었다.
상인 길드가 계속해서 성장하여 도시의 자치 및 경제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자, 여기에 대항하여 수공업자들의 길드가 형성되었다. 길드들은 공통적으로 ‘공동 저축’이라는 형태로 기금을 조성하여 사망이나 화재, 질병 및 도난으로 조합원이 피해를 입었을 시 이를 보상하는 손해보험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생명보험 제도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콜레기아가 길드로 진화하면서 죽음에 대한 보상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손해에 대해서도 손해를 보상하는 ‘대물보험’의 역할이 추가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국민연금? 국가와 교회가 주도한 연금 제도의 탄생
중세의 연금은 교회와 국가를 중심으로 등장했다. 은퇴한 성직자를 위한 종신연금은 수도원에 일정 금액을 지급하고 그가 사망할 때까지 매년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길드와는 별개로, 현재의 보험과 유사한 형태로 중세에 등장한 제도로는 연금이 있다. 연금은 크게 교회와 국가를 중심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교회는 8세기부터 종신연금을 제공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은퇴한 성직자를 위한 종신연금은 꽤나 빈번하게 지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종신연금의 한 예로 1308년 성 데니스 수도원장이 브레멘의 대사제에게 체결한 종신연금계약이 있는데, 이 계약은 대사제가 수도원에 2400리브르를 지급하고, 수도원은 그에게 사망 시까지 매년 400리브르를 지급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다. 덧붙여 2400리브르를 납입하고 2년 이내에 대사제가 사망하였을 경우 상속인에게 1000리브르를 반환하는 약속이 걸려 있었다.

     한편 국가 주도의 연금은 봉토를 대신하여 지급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잉글랜드의 헨리 1세는 1103년 프랜들 백작에게 매년 400마르크의 연금을 지급하고 여기에 대하여 프랜들 백작은 헨리 1세에게 각각 3필의 말을 소유한 1000명의 기사를 제공하는 계약을 맺었다. 연금제도를 통하여 발생하는 이익은 기독교가 금지하는 ‘이자 수취’에 해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확산되었다. 결국 13세기에 이르면 시민들이 시청이나 국가에 일시불을 지급하고 국가로부터 연금을 지급받는 형태의 연금 계약이 현재의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남아 있는 연금증서들을 통해 확인된다.
생명을 담보로 하는 사망보험의 시작
한편 생명을 담보로 사망 시 지급되는 형태의 사망보험은 15세기에 이르러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생명보험은 15세기 이후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해상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발생하는 사고의 규모가 그 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확대되자, 이들 리스크를 감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해상 활동을 중심으로 작성된 생명보험 계약은 크게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피보험자가 납치되었을 시 석방에 필요한 금액을 대납해주는 형태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노예의 생명을 피보험 대상으로 하는 계약이었다. 이러한 보험들은 기본적으로 노예를 생명이 아닌 상품으로 보았던 당시의 상황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며 본격적으로 피보험자가 자신의 생명을 부보대상으로 하는 사망보험은 좀 더 시간이 지난 뒤 생겨나게 된다.

     피보험자가 납치되었을 때 석방 금액을 대납해주는 예로 바르셀로나의 베르나르디 드 페레라(Bernardi de Ferrera)의 인질 보험 계약을 들 수 있다. 그는 1501년 10월 발렌시아에서 사르디니아로 향하는 항해 중 자신이 납치 되었을 경우 300두카트 한도 내에서 석방에 필요한 금액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5바르셀로나 파운드 8실링(보험금의 1.6%에 해당)을 납입하였다.
노예의 생명을 대상으로 한 보험은 이보다 조금 이른 시기인 1467년의 것으로, 역시 바르셀로나의 외과의사인 베르나 데 로르(Bernat dez Lor)가 그의 노예인 마리아(Maria)를 부보한 것이다. 그녀는 당시 35세로 임신 4~5개월차의 산모였으며, 그녀가 항해 중이나 항해 후 8일 이내에 임신, 혹은 출산으로 인해 사망한다면 3개월 내로 50 바르셀로나 파운드를 지급받는 조건이었다. 이 계약의 보험료는 월 4파운드로 보험금의 8%에 해당하는 보험요율이었다. 또한 1501년에는 루시아(Lucia)라는 산모가 3월 22일부터 12월까지 출산이나 여타의 이유로 사망할 경우 보험료를 지급하는 보험 계약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보험, 자본주의적 상품으로 전환되다

     지진해일,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부터 자동차, 비행기 사고에 이르기까지 현대사회의 위험은 보다 다양해졌다. 이에 따라 각종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보험도 보다 촘촘해졌다. 그러나 보험이 다양하게 발전한 것이 단순히 사회의 변화에 따라 위험이 보다 많아졌기 때문일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제까지 살펴본 보험의 원형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회에 존재했던 상호부조 제도들의 한 유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난 시간까지 살펴보았던 근대적 보험의 탄생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의 보험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전통 사회의 상호부조 방식이 근대적 보험으로 전환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무엇일까? 그것은 상호부조를 기반으로 한 사회제도였던 보험이 돈벌이 수단인 금융 상품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발상에서 시작된 상호부조가 금융 상품이 되어 판매되기까지, 그 역사를 되짚어보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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